학교 이야기를 쓰는 이유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하고,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함께 그려보는 것
대부분의 새로운 생각은 주변부나 그늘에서 시작되어 중심으로 옮겨온다. 그것은 종종 소수의 사람들만이 생각했던 것, 급진적이거나 전위적이거나 좀 지나치다고 여겨졌던 것, 혹은 그냥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거나 별달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었다. … 사람들은 처음에 그것을 극단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여긴다. 그래도 생각은 꾸준히 이동하고, 그러다보면 여정의 끝에 가서는 누구나 예전부터 그 생각을 죽 해왔던 것처럼된다. …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생물종과 같다. 그것은 진화한다. 서식지를 넓힌다. 주변 생태계를 바꾼다. 그러다 이윽고 처음부터 늘 거기 있었던 것처럼 환경에 녹아든다.
—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리베카 솔닛) 중
나는 사실 학교를 좋아한다.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면 대다수가 경험하는 폭력적인 입시와 환경을 겪었지만 여전히 그렇다. 중학생 때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짤은 저장했던 것 같지만.. (ㅎㅎ) 그런 규율과 억압의 기관으로서의 학교 안에서 다른 모습의 학교를 꽤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다른 사람에 비해 무척 운이 좋았다는 건 성인이 된 후에 알았다. 다른 사람들의 학교 경험을 들으며 ‘학교를 좋아한다’는 말이 꽤 자주 어색하게 여겨진 이유도 알게 됐다.
그럼에도 학교라는 주제가 계속 내 안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가 왜 학교를 좋아하는지 더 늦기 전에 깊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기 내내 겁이 많고 성취욕이 높아 모범생이긴 했지만, 실은 교과 성적과는 상관 없는 것들이 인간으로써 내 성장을 도와준다고 느꼈다. 중학교 2학년 때 다 같이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라든가, 가출한 친구를 혼내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돌보던 선생님들의 모습, 직접 학교 축제를 만들 수 있도록 축제 기획을 배우고 해냈던 순간 같은 게 중학교에 대한 좋은 기억으로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다.
학교에는 내게 자유를 주는 공간도 많았다. 언제든 열려있는 도서관, 도서관의 책들, 모여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복도 끝과 하교 길, 무한대의 감정을 나누는 친구들. 그리고 영화 <벌새>의 김영지 선생님처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선생님도 간혹 만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처음으로 캠퍼스를 걸어들어가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캠퍼스 양 쪽에 학생들이 학교에 청소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그때 학교가 기존의 세상을 이해하게끔 돕고 학생을 보호하는 것 외에도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순간 무척 안도했다. 나의 자유와 안녕 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유와 안녕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대학교는 그런 차원에서 내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다. 훌륭한 선생님과 친구들 덕분에 '나'를 넘어 구조적 차원의 사고를 할 수 있게 됐다.
대학에서 내 학력과 학벌이 개인적 노력의 결과라는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도 똑바로 알게 됐다. 다만 내가 근본적으로 열심히 학습해서 얻고 싶었던 것은 어떤 혜택이나 상징 만은 아니었다. 알게된 것 만큼의 책임감, 그리고 그 책임감을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을 얻고 싶었다. 아직도 김현미 선생님 연구실에 붙어있던 문구가 생각이 난다.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그 사이에는 잠시 덴마크에서 폴케호이스콜레(folkehøjskole)라는 학제를 경험했다. 호이스콜레에서는 매일 아침 작은 강당에 둘러앉아 서로의 안부를 나누고 다 함께 노래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시험이나 성적은 없었지만, 매일 수업을 듣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둥글게 모여 식사를 하고 문제가 생기면 위원회를 만들어 해결했다. 특히 다양한 문화의 친구들과 함께 사는 법,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 다양한 문화 등을 학습했다. 스포츠를 즐기는 문화 속에서 움츠려 있었던 신체 활동의 감각도 새로 배웠다.
이렇게 다양한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교에서 나는 보호받는 동시에 자유롭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 자신을 구축하는 동시에 세상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거의 무한대의 기회를 매일 가지고 있다는 자유. 혼자가 아니라 함께 생각을 나누며 더욱 풍요로워지는 경험. 그래서 지금도 내가 가장 재밌어 하는 것은 같은 주제를 둘러싼 각자의 관점과 현장을 듣는 것이다. 학교에 다닐 때는 늘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학교를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같은 주제에 대해 자기 관점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들, 선생님, 그리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내 생각에 도전하며 고유한 관점을 만들 수 있었다.
이렇게, '운 좋은' 나는 학교에서 종종 자기 주도적이고 성찰적인 배움의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때로는 그런 곳을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다만 그런 기회는 자주 생기는 것이 아니었고, 너무 특수한 경험으로 치부되어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삶의 어떤 국면을 지날 때마다 늘 다양한 학교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떠올렸고, 나누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삶, 사회의 모습은 학교에서의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게 나의 ‘특수한’ 경험이 아니길 바란다. 무엇이 내게 가치있었고,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사회에는 어떤 변화를 만들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다. 그런 뒤 ‘기존 세계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을 함께 실험해보는 장’이 되는 학교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 세상에 대해 성찰하고 직접 세계를 지어('worlding')볼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삶의 방식을 상상하고,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을 함께 그려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럼에도 나는 세상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주요한 주체이자 공간으로 학교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