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불완전한 세계를 가로지르는 언어

<해피엔드(2024)>, 서울독립영화제
‘사람들을 구분 짓는 체계가 붕괴 중인 일본에서 뭔가 크게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해피엔드>

최근에 영화 <해피엔드>가 좋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다. AI로 사람을 식별할 수 있는 근미래 도쿄가 배경이고, 자이니치(재일교포) 문제를 꽤 정면으로 다뤘으며, 음악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이 나온다는 것까지만 알고 드디어 보러갔다. 이 영화는 우정과 성장, 정치와 정체성, 불안한 시대와 감시 시스템, 미래와 현재의 겹침 같은 층위들이 섬세하게 얽혀 있었다. 예상보다 영화가 너무 인상적이고 여운이 길게 남아서 급히 글을 남겨본다.


영화의 시작 장면이 왜인지 기억에 남는다. 어두운 화면 속에 점멸하는 붉은 점들이 보이는데, 도쿄 고층 빌딩의 항공 장애 표시등이었다. 화면이 점점 밝아지며 텅 빈 도쿄의 밤을 누비는 청소년 다섯 명이 그려진다. (이때 깔리는 메인 테마 사운드 트랙이 무척 좋다.)

아이들은 음악 동아리를 하며 그들만의 세계에서 우정을 나누는데, 꽤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사실 큰 비행을 저지르는 건 아니다. 음악을 들으러 몰래 클럽에 들어간다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는 장치로 학교 경비아저씨를 따돌린다든가, 장비를 옮기다 말고 길에서 음악을 튼다든가, 교장의 차를 수직으로 세워놓아 골탕을 먹인다든가(이건 살짝 심했지만..) 그런 것들이다. 이 모든 비행들은 친한 친구인 유타가 주도하고 코우가 함께한다.

이렇게 크고작은 일로 경찰에 잡힐 때마다, 대충 돌려보내지는 유타와 달리 코우는 문제를 겪는다. 4대째 일본에서 살았지만 자이니치이기 때문에 외국인거주허가증을 요구받는 것이다. 이런 배경의 차이, 그리고 거기서 비롯되는 각자의 고민으로 인해 둘도 없는 두 친구 사이에 조금씩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다.


학교에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panopty'라는, 꽤 적나라한 의도의 감시시스템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이야기가 점차 고조되기 시작한다. 마치 학교가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어떤 아이들은 부조리에 강하고 유연하지 못하게 대항하게 되고, 어떤 아이들은 어떻게든 벌점 시스템에서 불리해지지 않기 위해 문제제기를 하려고 하지 않고, 어떤 아이들은 일본인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룰이 있어야 한다고, 애초에 찔리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될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러 일화 가운데서도 '비일본인'은 듣지 못하는 수업에서 몇몇 아이들이 쫓겨나자 감시시스템이 '무단 이탈'로 벌점을 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소수자들에게 사회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차별과 배제, 처벌을 하는지 잘 드러낸 장치였다. 차별하고 배제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스템과 불화하게끔 만드는 ​다양한 현실의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다섯 명의 아이들도 새로운 시스템에 각자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는데, 처음에는 세상은 망했기 때문에 음악에만 빠져있겠다는 유타가 자유로워보이면서도 조금 얄궂게 느껴졌다. 반면 코우는 점차 자신의 배경과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무언가 하고 싶어지고, 그 언어를 조금씩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 과정은 일종의 성장이기도 하다. 부조리에 뭔가 목소리를 내고 싶어지면, 그것은 어떤 울컥하고 답답한 마음을 만든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떤 책이나 친구 혹은 선생님을 만나며 대항할 수 있는 언어를 갖게 되고, 조금 혼란스럽고 불완전하지만 답답하던 마음이 터져나오는 시기를 지난다. 그것이 아주 거칠고 미성숙할지라도 뭔가 함께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에 덜 외로워지는 시기다. 나의 20대 초반을 떠올리면서, 코우의 그런 시간에 무척 공감했다.

당연하지만 점차 그렇게 간단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영화는 곧 알려준다. 코우는 룰에 대항하고 싶지만 동시에 두렵다. 이미 불이익 속에 살아가는 자신과 가족에게 미칠 더 큰 불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또 세상에 관심이 없어보이는 유타(감독의 말처럼 유타는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태도로 시스템에서 아예 빠져나와버린다는 방식을 취하는 인물이다.)가 가지고 있는 깊은 외로움과, 그 외로움을 우정으로 극복하려다 매번 실패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그럼에도 유타가 끝내('happy end')는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코우와의 우정을 매개로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고, 또 책임지는지 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완전히 우정이야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정치적이다. 우정이야기라고만 하기에는 각 개인들이 사회의 문제와 관계 맺는 방식이 전면에 나와있다. 그런데 정치적인 영화라고만 하기에는 우정이 너무 중요하다. 청소년기가 끝나갈 무렵 겪는 각자의 깊은 외로움과 불안함이 너무 잘 드러난다. 아직 자신과도, 세계와도 능숙하게 관계맺는 방법을 갖추지 못한 10대들이 우정으로나마 외로움과 불안함의 정중앙을 함께 걸어내는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나 역시 왠지 비슷하게 지나온 것 같은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지금 어디선가 또 그 시간을 겪고 있을 애들이 있으리라는 먹먹함을 동시에 느꼈다.


여운이 가시기 전에 글을 좀 적어두려는 마음이었는데,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들이 잘 전달되지 않고 줄거리 설명에 그치게 되는 것 같아 아쉽다. 영화는 물론이고 씨네 21의 배우 인터뷰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나도 한 번 더 보고 다시 글을 써보고 싶다. 실은 내용 외에도 미장센과 음악이 아주 근사한 영화였다(알고 보니 감독이 류이치 사카모토의 아들이었다..). 특히 근미래를 그리되 AI 프로그램이 적용된 모습이나 얼굴을 식별하는 시스템 빼고는 현재와 이질감 없이 그려서 전반적으로 더 와닿았던 것 같다.

세계의 모든 소식이 어지러운 요즘, 근 30년 내 일본을 그린 영화 속 혼란과 지금의 우리가 겪는 혼란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보는 내내 왜인지 위로가 되었다. 10대 때의 외로움, 20대 때의 성장, 30대가 된 지금의 내 몫, 그리고 미래를 조금씩 연결하며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영화였다. 30대가 되고 본 영화 중에는 거의 가장 인상적인 영화라(비슷하게 좋아하는 다른 영화는 <애프터 양>이다.) 소장도 해보고 싶다.


가까운 미래의 도쿄를 배경으로 한 <해피엔드>는 오늘날 일본에 이미 존재하는 사회정치적 역학을 한층 부각시킨다. 우익 정부와 민족주의적 외국인 혐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이민자들이 일본에 정착하면서 다양한 민족과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함께 성장하게 된다. <해피엔드>의 10대 주인공들은 바로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인이 되어 간다.

두 주인공 유타와 코우는 정치적 억압에 직면하여 각기 다른 익숙한 태도를 보여 준다. 한 명은 급진적인 변화를 위해 싸우고, 다른 한 명은 편안함을 지키려 한다. 이로 인해 서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모르는 두 절친 사이에 마찰이 생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성장했을 때에도 사회정치적 문제를 깊이 고민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 장난치고 10대 특유의 철없음을 즐기는 것이 중요했다. 나는 이러한 부분도 진솔하게 담고 싶었다.

가장 단순한 층위에서 <해피엔드>는 자연스러운 친구 사이의 멀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더 거대한 힘이 우리의 삶과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형성하는지 탐구한다. 불안이 만연한 환경에서 자란 <해피엔드>의 10대들은 미래에 대한 집단적인 불안을 처리할 방법을 찾고자 노력한다. 추측만 가능한 미래를 들여다보며 현재 우리가 느끼는 불안을 비춰 봄으로써,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 서울독립영화제 Directing In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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