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장소에 대한 새로운 관점
어제는 오랜만에 자유님을 만났다. 자유님은 회사에서 알게 된 친구인데, 관심사와 가치관이 잘 맞아서 지금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됐다. 얼마 전 회사를 떠난 자유님은 작업실을 열기 위해 준비 중이다. 나는 회사를 떠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하고, 배우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런 선택이 무척 담대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유님의 이런 선택이 내가 요즘 고민하던 것과도 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시간: 현재를 유예하지 않기
자유님은 원하는 분야를 해외에서 공부하기 위해 입학까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득 해외에서 보낼 그 시간이, 그 자체가 아니라 공부 이후를 위한 시간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공부를 하고 오면 이런 것들을 할 수 있겠지, 이런 기회들이 생기겠지,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겠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다가 '그걸 왜 지금 하면 안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냥 한국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바로 작업실을 열 준비를 시작했다. 새 작업실 공간을 정돈하며 먼지구덩이에서 씨름 중이라며 웃는 자유님 얼굴이 가뿐하고, 설레어 보였다.
한편 나는 요즘 어떤 무의미함에 질려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왜 이렇게 느낄까 혼자 고민해봤는데, 내가 시간을 써 온 방식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랜 시간 현재를 미래를 위해 소모했다. 희생시켰다는 표현이 더 나을까 싶기도 하다. 세어보니 최근 10년 정도를 내내 무언가 계획하고, 계획을 시뮬레이션하고, 달성하기 위해 무척 애쓰면서 보냈다. 그렇게 보낸 이유는 눈앞에 달성하면 좋을 것 같은 목표 지점이 보였고, 그 지점을 넘어가면 현재의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거나 아주 새롭게 행복해 질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이니 매번 목표나 벗어나려는 것은 달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런 방식으로 시간을 쓰길 반복하다보니 더이상 미래를 위해 현재를 소모시키는 방식이 내게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돌이켜보면 어떤 목표 지점을 도달했을 때 느끼는 행복감은 내 상상보다 매번 미미했다. 때로는 그 미미함조차 느낄 틈 없이 바로 다음 목표를 위해 다시 준비태세를 갖춰야 할 때도 있었다. 20대 때는 이런 삶을 무척 경계하면서 현재에 발붙이고 살았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됐을까. 아마도 현실적인 이유와 기질적인 이유 둘 다 있는 것 같다. 현실적으로는 스스로 생계와 커리어를 책임질 시점이 왔기 때문이고, 기질적으로는 성취(에 의한 도파민)를 좇았기 때문이다. 두 가지가 섞이면서 생각해 볼 틈 없이 현재를 쓰는 방법을 잠시 잊어버렸던 것 같다.
이제는 다시 매일의 일상 속에서 지금 느낄 수 있는 행복과 즐거움을 우선순위에 두려고 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글쓰기도 다시 시작했다.
장소: 머무는 것이 진취적일 수 있을까
다른 한 편, 최근 1년간 크게 바뀐 점이 있다면 해외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진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늘 해외에서 공부하거나 일하고 싶었기 때문에 스스로도 좀 신기하다. 최근까지도 당연히 언젠가는 간다고 생각했다. 한국을 벗어나 해외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해외가 더 넓고, 발전된 세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 해외란 북미나 유럽을 뜻했다. 북미나 유럽을 일종의 '나아갈 방향'이라고 오만하게 생각했다. 거칠게 말하면 문화적으로나 시민의식적으로나 한국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또 국적이나 출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런 보수적인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는 게 멋진 삶이라고 여겼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가 인류 역사 속에서 끼친 해악을 배우고, 상상의 공동체같은 개념을 흡수한 것까진 괜찮았다. 다만 거기서 나아가 국적이나 출신에 얽매이는 건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삶이라고 납작하게 바라봤다. 지금 돌아보니 어디서 태어났는지 보다는 무엇으로, 어떻게 자신을 형성했는지가 사람을 구성한다는, 소위 진보적인 가치관을 가지고서 북미/유럽을 도달할 지점으로 생각한 건 또 참 보수적이라 웃기다. 신자유주의적인 환경에서 글로벌 시민 교육을 함께 받은 혼란한 사람이랄까..
지금은 북미나 유럽을 더 나은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그곳만의 좋음과 문제가 있다. 여기에는 여기의 문제와 좋음이 있다. 특히 지난 몇 개월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경험하면서 내가 섣부른 판단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와 잘 맞지 않는 환경에서 나 자신을 구분해 내려고 했던 과거의 나를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문제를 느끼는 이곳의 환경을 스스로 좋게 바꾸는 것에 더 의욕이 난다. 살면서 처음으로 '여기에 머물겠다'는 결정이, 떠나버리는 것보다 더 진취적인 결정으로 느껴진다. 내 선택과 상관 없이 주어지고 정해진 것을 떠나서 새로운 장소를 개척하는 것은 정말 멋진 도전이지만, 주어진 자리를 지키고 가꾸는 것 역시 정성이 많이 드는 큰 도전이라는 것을 최근 많이 배웠다.
내 삶의 닻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살아온 곳에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내 삶을 지탱하는 닻이다. 그동안 수많은 삶의 변화,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는 그 순간들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내가 가진 관계 덕분이었다. 소중한 친구들, 가족, 그리고 새로운 가족까지. 오랫동안 그걸 모른 채 일, 성취의 영역에서 내 삶의 닻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힘들 때조차도 매번 관계로 돌아가서 도움을 요청하고, 요청 받으면서 버틸 수 있었다는 걸 이제야 발견한다.
이제는 지금, 여기에서 내 삶의 닻을 발견하고 소중히 여기고 싶다. 늘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했던 나에게 여전히 조금 어색하지만, 반가운 마음이 든다.